정상성의 언어로 살인을 연습하는 사회

ForeverDis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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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생학은 과거의 광기라는 믿음은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자기기만이다. 특정 시대의 실패한 실험, 극단적 이념, 미치광이 독재자의 일탈로 밀어넣는 순간 현재의 질서는 무죄가 된다. 그러나 우생학은 사라진 적이 없다. 단지 형태를 바꿨다.

더 이상 피를 요구하지 않고,
총을 들지 않으며, 법률로 명령하지도 않는다. 대신 기준을 만든다. 설명을 제공하고, 통계를 제시하고,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제거되지 않는다. 정렬된다. 관리되고, 평가되고, 자연스럽게 밀려난다.

이 방식은 너무 매끄러워서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효과적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제거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정상으로 설정하느냐다. 외형, 성격, 생산성, 이동 경로, 성취의 속도, 감정의 안정성, 사회적 적합성. 이 기준들은 공식적으로 선언되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이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는 비난받지 않는다. 더 교묘하게 취급된다. 설명의 대상이 되고, 위험 요소로 관리되며, 스스로를 교정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실패는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 되고, 질병은 환경이 아니라 관리 실패가 되며, 고통은 사회의 결함이 아니라 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환원된다.

이때 사용되는 언어는 매우 정제되어 있다. 과학, 의학, 데이터, 객관성, 합리성. 그러나 이 언어는 돌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를 긋기 위해 사용된다.

조심하라는 말은 권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책임의 이전이다. 위험을 알렸으니 이제 결과는 당신의 몫이라는 선언이다. 이 구조가 완성되면 노골적인 말들이 뒤따른다.

어떤 존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어떤 삶은 비효율적이며, 어떤 고통은 자연 선택의 부산물이라는 말들. 이 발언들은 충격적이지만 갑작스럽지 않다. 이미 일상적으로 유통된 논리를 거칠게 드러낸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이 사회는 스스로를 우생학적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우생학을 혐오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우생학이 요구하는 모든 전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거가 아닌 방치, 학살이 아닌 정렬, 명령이 아닌 합의.

이 방식은 과거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누구도 악인이 되지 않고, 모두가 합리적 선택을 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라는 점이다. 기준은 누적되고, 설명은 반복되며, 판단은 자동화된다. 인간은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는다. 대신 위치를 부여받는다.

정상에서 벗어난 존재를 보호하지 않고 관리하는 방식, 개인에게 책임을 집중시키는 설명 체계, 인간의 가치를 효율과 적합성으로 환산하는 습관. 이 조합은 잔인함 없이 인간을 소모하는 법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가장 불편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 사회의 문제는 잔인해서가 아니다.

너무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인간을 걸러낼 수 있을 만큼, 소리 없이 존재를 무력화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통과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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