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왜 ‘잘생김’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숭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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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균만 안전한 사회에서 인재는 어떻게 사라지는가

 한국 사회에서 외모는 단순한 미적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성격, 태도, 계급, 위험도, 그리고 ‘통제 가능성’까지 압축해 보여주는 사회적 기호다. 그래서 한국의 채용 문제를 “외모를 본다/안 본다”의 도덕 논쟁으로 축소하는 순간, 본질은 사라진다. 채용이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먼저 외모에 의미를 부여해 놓고, 채용은 그 판단을 제도적으로 재사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말하는 ‘잘생김’은 흔히 오해된다. 그것은 결코 강한 매력이나 개성, 존재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 사회가 선호하는 외모는 눈에 띄지 않는 평균성, 과잉되지 않은 자기관리, 튀지 않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하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잘생겼다’는 말은 미적 찬사가 아니라 무해성 인증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외모를 숭배한다. 미디어는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를 끝없이 소비하고, 광고와 콘텐츠는 외모를 성공의 상징처럼 전시한다. 그러나 현실의 조직과 일상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너무 잘생긴 사람, 너무 눈에 띄는 사람, 자기관리가 과도하게 드러나는 사람은 경계 대상이 된다. 실력이 있든 없든, 그는 ‘팀을 흔들 수 있는 변수’로 분류된다.

그래서 실제로 선택되는 것은 잘생긴 사람도, 못생긴 사람도 아니다. 선택되는 것은 무난한 사람, 이목을 끌지 못하는 사람, 설명 없이도 ‘문제 없을 것 같은 사람’이다. 못생긴 사람은 배제되고, 잘생긴 사람은 우상화되거나 소비될 뿐, 조직 내부의 신뢰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이 구조 속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늘 평균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

이 현상은 한국 채용 구조가 왜 유난히 ‘완벽주의자’를 양산하는지 설명해준다. 한국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실험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패를 감당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미 검증된 경로를 밟았고, 흠결이 없으며, 설명 가능한 이력만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채용 공고는 구체적이지 않고, 연봉은 숨겨지며, 요구 조건은 과도하게 나열된다. 이는 무능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극단적 회피다.

문제는 이 구조가 글로벌 흐름과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서구 사회, 특히 미국과 유럽은 이미 한 차례 이 과정을 겪었다. 외모 숭배의 극대화, 스타 시스템의 과잉, 이미지 소비의 포화 이후, 그들은 점점 평균성의 위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실험을 장려하고, 실패를 전제로 채용하며, 이력보다 문제 해결 과정을 보려는 시도로 이동 중이다. 반면 한국 사회는 아직도 ‘완성된 인간’을 찾는다. 그 결과, 실험은 줄고 산업은 축소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인재를 선별하지 못한다. 오히려 채용 과정을 가장 잘 속이는 사람, 완벽주의적 기준을 가장 능숙하게 연기하는 사람만 살아남는다. 실제 실무 역량이나 성장 가능성은 그 다음 문제다. 그래서 기업은 늘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개인은 늘 “기회가 없다”고 느낀다. 양쪽 모두 틀리지 않았지만, 구조 자체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외모가 아니다. 채용도 아니다. 인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다.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평균만을 선택하고, 개성을 소비하면서도 조직 안에서는 제거한다. 잘생긴 남자를 숭배하면서도 현실에서는 피하고, 못생긴 남자를 때리면서도 결국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순 위에서, 한국 사회는 오늘도 “왜 인재가 없느냐”고 묻는다.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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