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무너진 이유를 사람들은 자주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 사회성이 부족해서, 예민해서, 피해의식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가장 쉽고 안전한 책임 회피다. 원인을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순간, 구조는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다.
이 사회는 닫힌 방처럼 작동한다. 누구도 완전히 혼자가 아니지만,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모든 말은 의도가 아니라 해석으로 판단되고, 모든 행동은 맥락이 아니라 인격의 총평으로 환원된다. 한 번의 실수는 기록이 되고, 한 번의 발언은 낙인이 된다. 설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수정은 관용이 아니라 변명으로 취급된다. 이런 환경에서 말하기는 소통이 아니라 자해에 가깝다. 침묵과 거리 두기가 미덕이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이유다.
정상성은 이 구조의 핵심 장치다. 여기서 정상적이라는 말은 평균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통제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다는 뜻이다. 질문은 문제 제기가 되고, 실패는 학습이 아니라 탈락 신호가 된다. 자율성은 능력이 아니라 리스크로 분류된다. 차이는 조율되지 않고 곧바로 결함으로 처리된다. 이 사회에서 인간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다.
이 조건에서 적대는 선택이 아니다. 자동 생성된다. 사람들은 남을 이기고 싶어서 공격하지 않는다. 밀려날까 봐, 무시당할까 봐, 기준에서 벗어날까 봐 불안해서 방어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 불안은 위를 향하지 못한다. 구조를 겨냥할 언어도, 통로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가장 가까운 타인이 문제의 원인으로 오인된다. 경쟁은 본능이 아니라, 불안을 처리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대체 반응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내 옆의 한국인은 나를 적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나를 해치고 싶어서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와 같은 기준에 노출된 사람이고, 같은 방 안에서 불안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적대는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설계된 환경에서 반복 학습된 반응이다.
The Good Place에서 타하니와 카밀라는 서로를 미워한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부모가 만든 평가 시스템의 희생자였다. 갈등의 원인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였다. 문제는 자매가 아니라, 그들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서열화하던 기준이었다.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갈등은 개인 간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스템의 부산물이다.
그럼에도 이 현실을 비판하는 많은 목소리들은 분노의 방향을 개인에게 고정한다. 국민성, 열등감, 성향 같은 말로 설명하는 순간, 구조는 다시 사라진다. 닫힌 방을 비판하면서, 닫힌 방의 언어를 반복하는 셈이다. 그렇게 책임은 아래로 흘러가고, 시스템은 무사히 유지된다.
이 사회의 위기는 경제의 위기가 아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다루지 못하는 방식의 위기다. 사람다움은 비용이 되었고, 주체성은 위험 요소가 되었으며, 신뢰는 관리 실패로 간주된다. 이 문제는 개인의 태도를 교정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를 적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구조를 인식하지 않는 한, 이 방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계속 조용히 관계를 끊고, 말수를 줄이고, 인간성을 접어두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