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열이라는 환각에 대하여

ForeverDisney
0






— 동아시아의 황금기와 구조의 붕괴

 서열이라는 것은 실력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구조가 유지되는 동안만 작동하는 집단적 환각이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문명이나 국가, 혹은 개인이 “원래부터 강했다”고 말하지만,
역사를 조금만 멀리서 보면 그런 주장은 거의 성립하지 않는다.
강함은 본질이 아니라, 언제나 환경과 구조의 함수이기 때문이다.

칭기즈칸 이전의 세계는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시기 세계의 중심은 서구가 아니었다.
동아시아, 동남아, 그리고 이슬람 세계는
서로 단절된 문명권이 아니라 하나의 연결된 네트워크였다.

송은 해상 무역과 도시 경제를 기반으로 성장한 상업 국가였고,
고려(Corea)는 그 네트워크의 동북단에서
상업과 외교가 교차하는 분명한 노드로 기능했다.
동남아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핵심 허브였으며,
아랍과 페르시아 세계는 지식, 금융, 항해의 중심지였다.

이 구조 안에서 서구는 주변부였다.
문명적으로 열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속한 구조가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이 시기의 번영이
어떤 제국이 강압적으로 유지한 질서가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군사적 지배가 아니라
상인, 항구, 도시, 교류가 만들어낸 질서였다.
고려가 “세계와 연결되려 했던 국가”였다는 평가는
이 맥락에서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이 질서는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의 충격으로 붕괴한다.
몽골 제국의 등장은 흔히 “동서 교류를 확대한 사건”으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기존의 교류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자발적 상업 네트워크는 군사적 강제 통합으로 대체되었고,
도시의 자율성과 문화적 다원성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 시점 이후의 동아시아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른 구조 속으로 진입한다.
이 변화는 “아시아가 원래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판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리고 구조가 바뀌는 순간,
기존의 상위는 하위로 내려가고
주변부는 새로운 중심으로 이동한다.

서열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기억된다.

이 착시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영어권 담론에서
Joseon Dynasty와 Korean War는 반복적으로 소비되지만,
Corea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조선은 닫힌 질서, 규범 중심 사회, 근대 전환 실패라는
간단한 서사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고려는 설명이 길다.
무역, 다극 외교, 불교 문화,
아랍과 동남아로 이어지는 간접적 연결.
이 복잡성은 소비되기 어렵다.
그래서 지워졌다.

그러나 지워졌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Corea라는 이름이 세계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반증이다.

이 구조적 착시는 개인의 삶에서도 반복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서열을 매긴다.
학벌, 연봉, 외모, 팔로워 수, 국가 순위.
그러나 이 서열은 우월감의 표현이라기보다
평가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관리하는 장치에 가깝다.

사람들은 높아지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바깥으로 밀려나는 불안을 피하기 위해
서로를 줄 세운다.
숫자는 자부심의 증거가 아니라
“나는 아직 탈락하지 않았다”는
존재 확인의 도구가 된다.

이 구조 안에서는
인간적인 선택이 점점 불가능해진다.
질문은 문제 제기로 해석되고,
자율성은 위험 요소로 간주되며,
주체성은 통제 불가능성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침묵하고,
그래서 철수하며,
그래서 점점 더 판 밖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이 현상은 개인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다.
도덕의 문제도, 세대의 문제도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서열을 없애자는 구호는 그래서 무력하다.
서열은 언제나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서열을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라,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 특정 조건에서만 작동하는 장치라는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다.

칭기즈칸 이전의 동아시아는
“아시아가 원래 위대했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 시기는 단지
다른 구조가 가능했던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구조는 언제든 다시 바뀐다.

서열이란 결국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말해주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판 위에 서 있는지를
착각하게 만드는 장치다.

그 환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위와 하위라는 말은
놀랄 만큼 빠르게 힘을 잃는다.
Tags

댓글 쓰기

0댓글

댓글 쓰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