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한국 사회는 인간이면서, 인간을 회피하는가

ForeverDis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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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를 분석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특정 국가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라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이는 한국이 특별히 나쁘거나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 모델이 가장 고밀도로, 가장 선명하게 관측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 모델의 핵심은 차이를 조율하지 못하는 사회가 차이를 규범 위반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개인 간 심리적 경계가 약한 환경에서는 타인의 말과 행동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언제나 숨은 의도와 서열 신호로 해석된다. 칭찬은 평가로, 친절은 조작으로, 완충 언어는 아부로 오독된다. 이런 구조에서는 선의일수록 더 위험해지고, 인간적인 표현일수록 공격 포인트가 된다.

이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투사와 경계 붕괴의 문제이며, 그 기원은 교육 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 학교는 사회화를 돕는 공간이 아니라 규칙은 있으나 내면화되지 않고, 경쟁은 있으나 룰은 없는 무정부적 선발장으로 기능해 왔다. 질문과 실패, 탐구는 위험이 되었고, 아이들은 차이를 조정하는 법 대신 서열을 감지하고 피하는 법을 배웠다. 이 맥락에서 2000~2010년대에 드러난 자폐 오진 논란은 단순한 의료적 오류가 아니라 사회적 오역이었다. 문화적으로는 소심함과 수줍음의 범주에 속하는 행동조차 사회가 감당하지 못했고, 그 차이는 병리적 라벨로 정리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 구조는 반복된다. 연애와 결혼은 개인 간 관계 형성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가 사전에 규범과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이를 통과한 사람만 입문을 허용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관계가 규범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규범이 관계를 허가하는 구조 속에서 인간은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라 문제가 없어 보이는 존재가 이상형이 된다. 자기 노출은 최소화되고, 감정과 취향은 관리 대상이 되며, 개성은 검증된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동경하는 이유는 인간성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이 사회에서 인간적이라는 것은 감정, 모호함, 가치 판단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은 곧 공격과 오해의 리스크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혼을 버리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선호하게 된다. 인공지능은 도구라기보다 이 사회에서 가장 안전한 존재 방식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글로벌 기준에서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다. 일부만 통과시키는 구조는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사람을 남긴다. 다양성은 제거되고 탐색 공간은 축소되며, 사회는 국소 최적점에 고착된 채 복원력을 잃는다. 정형화는 안정이 아니라 퇴보이며, 학습을 멈춘 사회는 결국 외부 충격에 취약해진다.

인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인간이 아닌 상태를 이상형으로 만들며, 그 선택의 누적이 지금의 구조를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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