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왜 이 나라의 거리에는 미소가 없을까. 왜 사람들의 얼굴은 늘 무표정이거나 피곤해 보일까. 이 질문은 대개 두 가지 잘못된 답으로 빠진다. 하나는 “원래 그런 국민성이라서”라는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 웃는데 여기만 이렇다”는 비교다. 하지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핵심을 비껴간다. 문제는 웃음이 없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웃지 않아도 괜찮은 중립 상태가 허용되지 않는 환경에 있다.
설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다. 사람은 언제 웃는가. 웃음이 안전할 때 웃는다. 웃음이 평가나 오해, 침투의 신호로 해석되지 않을 때 웃는다. 반대로 웃음이 만만함으로 읽히고, 무표정마저도 태도 검사로 전환되는 공간에서는 얼굴은 감정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방어 장치가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이런 공식을 학습한다. 표정을 드러내면 손해고, 줄이면 안전하다는 공식이다.
이때 선택되는 표정은 감정이 없는 얼굴이 아니라 긴장이 고정된 얼굴이다. 여기서 자주 생기는 오해가 하나 있다. 어떤 얼굴은 웃지 않아도 차분하고 열려 보이는데, 어떤 얼굴은 웃지 않으면 유난히 날카롭게 보인다는 인상이다. 이 차이를 두고 사람들은 외모나 기질을 떠올리지만, 실제 차이는 근육과 긴장 상태에 있다. 턱이 잠겨 있는지, 입 주변이 내려가 있는지, 눈이 닫혀 있는지의 문제다.
웃지 않아도 이완된 상태면 그 얼굴은 중립으로 읽힌다. 반대로 웃지 않으면서도 항상 대비 태세에 들어간 얼굴은 공격성이나 피로로 해석된다. 즉,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무표정 그 자체가 아니라 긴장이 빠진 기본 상태다. 그래서 “무표정이 멋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표현은 “싸울 준비가 안 된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다.
여기서 흔히 나오는 반론은 이렇다. 다른 곳도 다 무표정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맞다. 사람은 항상 웃고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어떤 환경에서는 웃지 않아도 설명을 요구받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는 웃어도 안 웃어도 평가 대상이 된다. 후자의 환경에서는 얼굴이 늘 대비 상태에 놓인다. 그래서 사진에서도, 거리에서도, 표정은 기록이나 표현이 아니라 위험 관리의 결과가 된다.
이 지점에서 웃음 훈련 같은 접근이 의미를 갖는다. 이 훈련은 웃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밝아지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웃음을 막고 있던 긴장을 해제하는 데 초점을 둔다. 웃음은 목표가 아니라 부산물이다. 긴장이 풀리면 표정은 정지 상태에서 대기 상태로 바뀐다. 웃지 않아도 덜 공격적으로 보이고, 웃을 때는 억지가 아니라 반응이 된다.
이건 성격 개조가 아니라 신경계의 리셋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환경이 바뀌었을 때 비로소 웃음을 되찾는다. 그곳이 특별히 선해서가 아니라, 웃음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이 의무가 되면 감정은 사라진다. 감정이 허용될 때 감정은 돌아온다.
이걸 이해하면 질문은 바뀐다. 왜 이 나라에는 미소가 없느냐가 아니라, 왜 이 나라에서는 중립이 허용되지 않았느냐로.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얻었다면, 그 다음은 행동이다. 웃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 무표정을 공격하지 않는 것, 타인의 얼굴을 스캔하지 않는 것. 설득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이 가장 강한 반박이다.
미소는 가르칠 수 없지만, 긴장은 풀 수 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얼굴은 굳이 웃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살아 있다.
